성공이란 개념을 바꾸게 해 준 일본에서의 2년6개월




 베란다 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녹음이 짙어진 나무들과 들려오는 매미 소리, 그리고 바람에 시원하게 울리는 나뭇잎 소리들... 현재 서른넷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유학을 준비하며, 지난 2년6개월간의 일본생활을 마무리하고 있는 나에게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분들을 알고 사귈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일본 취업을 결심하게 된 것은 2005년 겨울 언저리였다. 2003년 대학을 졸업한 후 중학교 기간제 교사와 학원 강사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앞으로의 내 인생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라는 회의감이 말이다. 어느 날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한눈에 들어오는 정보가 있었다. 일본IT취업연수. 대학교시절 일본어교육을 복수전공하고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다녀온 경험이 있을 정도로 평소 일본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그 사이트를 보는 순간 “이거야!”라고 순간 직감하게 되었다. 그 날부터 일본취업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서울에 있는 C 연수센터에 등록하기로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주변에서는 이미 서른이라는 나이에 무모한 도전이라고 걱정하시며 만류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다. 하지만 나에게는 무모한 도전이라기보다는 무리한 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부모님께 부담을 드릴 수 없었고, 300만원이란 수강비, 지방에서 살고 있었기에 서울에서의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모은 자금들을 쏟아 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분들이 이모님, 대학교 동아리친구, 죽마고우들... 이들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 여기에 있을 수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연수를 받겠다고 한 날부터 물심양면으로 버팀목이 되어주신 이모님 그리고 무작정 상경하여 당시 서울에서 IT관계 직장에 근무하며 막 자리 잡아가던 대학 동아리 친구가 자기 방 하나를 선뜻 빌려 주어 주거의 문제가 해결 되었다. 아무리 친구라도 함께 살게 되면 서로의 단점이 보이게 되고 힘들어지기 나름인데, 그 친구는 IT에 대해서도 틈만 나면 이것저것 신경 써 주었고 그 밖에도 내가 너무 미안할 정도로 잘 해 주었기에 지금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그렇게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난 다시 고3으로 돌아갔다는 마음으로 연수에 임했다. 하루 8시간의 수업, 밤늦은 시간까지의 자습. 정말 고3 생활과 꼭 같은 패턴이었다. 하지만 다시 공부 할 수 있다는게 기뻤고 내가 가고 싶어한 일본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생각하며 학업에 최선을 다했다.

 몇 달간의 연수 기간이 흘러 문득 이런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일본어 공부를 우선해야하나... IT공부를 우선해야하나... 지금은 명백한 답을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대부분의 연수생들이 일본어, IT 모두 초보였기에 그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던 차였다. 그중에는 일본에 가 있는 친구가 일본어 별로 안 중요하더라며 이야기 하던 사람도 있었기에 마음은 더욱 복잡해져 갔다. 그러나 그 해답은 일본에 들어간 얼마 후 명쾌하게 나에게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어를 중점적으로 공부하되 IT는 넓은 범위로 기초를 닦아 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IT능력이 있어도 일본어가 되지 않으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 갈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일본에서 어느 분야의 일을 하게 될 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일본에 온 후 1년 이상은 한국인과 만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일본의 코리아타운이라는 신오오쿠보(新大久保) 역시 중요한 약속이 아니면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일본에 와 얼마지 않아 유명포털사이트의 동경유학생 카페에서 주최하는 한·일교류회에 참가하기 위해 신오오쿠보에 들른 적이 있었다. 거기서 한국을 좋아하는 일본인 주부 미도리상을 만나 그 분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지인들을 소개 받기도 했다. 그 중에서 재일교포이신 양자누님을 만나 지금은 누님 동생하는 사이로 지내고 있다. 한 번씩 양자누님의 집을 방문하면 해주시는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런데 간혹 그런 교류회를 단지 즐기기 위해 참여하고 있는 유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집에 있을 때는 한국드라마나 영화는 거의 보지 않았고, 언제나 습관적으로 TV를 켜놓고 일본방송을 계속 들었던 것 역시 듣기 연습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일본 방송의 대부분의 말을 이해할 수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취업 업체에 면접을 보는 날이 다가왔다. 당시 연수생들 사이에서의 이슈는 일본계회사&한국계회사 어느 쪽을 우선할 것인가였다. 일본계회사와 한국계회사의 차이점은 급료였다. 일본계회사가 한국계회사보다 상대적으로 임금이 적은 것이 사실이지만 임금을 우선 할 것인가, 일본계 회사 취업을 우선 할 것인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일본어공부를 우선해야 한다는 것과 함께 회사 역시 일본계회사를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연수원이 일본계 인재파견회사인 A사와 협약을 맺고 있어 가장 먼저 면접을 보았으며, 난 처음부터 이 회사에 들어가야 겠다고 마음을 먹고 준비에 임했고 면접에 합격하여 일찌감치 취업처를 결정할 수 있었다.


 일본에 들어갈 시기가 됐을 무렵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했던 친구들이 그 동안 모은 친목회비를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뜻 나에게 주었다. 일본 들어가서 초기 정착 비용으로 쓰라며 말이다. 내가 친구들에게 해 준 것도 별로 없는데 언제나 넉넉한 마음으로 날 보듬어 주는 그들이 너무나 고마울 따름이고 언젠가는 어떤 형식으로든 갚아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다.


 일본에 들어가 집을 구한 첫날은 결코 잊을 수 없다. 회사에서 보증을 선 1층 원룸이었다. 방은 책상이 들어서면 두 사람 정도 누울 공간이 있는 넓이였고, 마룻바닥에 거기다 커텐이 없으면 바깥에서 집안이 훤히 보였으며, 그것도 이불을 구입할 겨를이 없어, 겨울에 신문지를 덮고 잔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마치 군입대해서 보낸 첫날밤이 생각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2년 반이 지난 지금은 녹음과 하천이 내다보이는 베란다와 방2칸에 부엌, 화장실과 욕실이 따로 있는 맨션에서 살고 있으니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에서의 처음 2달 동안 파견되어 나간 곳은 도쿄 옆 카나가와현에 있는 작은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였다. 그런데 그 작은 회사가 일본 서버관련 대기업인 NEC사와 연계해 일본의 유명 맥주회사인 아사히 맥주회사의 데이터베이스 개선 작업을 맡고 있었다. 난 거기서 어플리케이션의 테스트 작업을 맡게 되었다. 한국인 사수도 없는 상황에서 소위 맨땅에 해딩하듯 일을 해야했다.  처음엔 리더가 A를 시켰는데 난 B를 하고 있는 상황이 적지 않게 발생해 곤란했던 적도 많았다. 어떻게든 빨리 일에 익숙해 지기위해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일본어와 IT실력이 되지 않는 이상 부지런히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 절대 지각하지 않고 작업시간에 딴 짓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직장 내 보안관계로 인터넷을 할 수 가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직장에서도 인터넷을 할 수 있었건만 퇴근할 때까지 인터넷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었다. 한국에서도 보통 수준으로 인터넷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담배를 끊을 때도 금단현상을 겪지 않았건만 인터넷으로 금단현상을 느낄 정도라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덕분에 자신의 인터넷 사용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두 달간은 일본의 직장문화에 대해(IT에 한해서일지도 모르나)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기간이었다. 먼저 사원들이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자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한국인들도 부지런하다고 하나 적어도 내 생각에는 일본인들이 더 부지런하고 일처리가 철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다리도 한 번 두들기는게 아니라 두 번 세 번 두들기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고, 이러한 철저함이 속도는 느리지만 지금의 일본의 초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한 두시간의 잔업은 당연한 듯 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한국인에 대한 불만중 하나가 칼 퇴근에 목숨 건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당시 내 주위에도 일본까지 와서 잔업을 해야하나 라고 투덜거리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주5일제인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 정도는 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직장에서 인정을 받기위해서도 어느 정도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두 달이 흘러 그 곳에서 나오게 됐을 때 DB리더가 못내 아쉬워하며 혹시 지금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우리 회사에 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취업한 회사는 IT와는 거리가 먼 인재파견회사였기에 파견처를 찾는데 언제나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참에 확 전직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아직은 더 다양한 경험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결국 그 제안은 물에 흘려보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당시 전직을 포기한게 정말 잘 한 선택이라 생각하고 있다. 다음으로 찾아온 파견처가 일본생활의 아주 큰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찾아온 두 번째 파견처, 일본 최대 핸드폰 통신회사인 NTT Docomo사의 프로젝트에 참여 할 수 있는 큰 기회였기에 꼭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나와 나보다 한 살 위였던 형이 함께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면접을 보고 난 후 일주일동안 연락이 없었기에 단념하고 있었는데 2주째 되던 날, 나만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면접관이었던 일본인 두 명은 지금 둘도 없는 사이가 됐다. 훗날 왜 나를 뽑았냐고 물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 답은 간단했다. “네가 일본어를 좀 더 잘했기 때문이야.”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IT실력은 경력자를 제외하고는 거기서 거기. 결국 일본어를 못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설령 경력자라고해도 일본어가 되지 않으면 절대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지 못한다. 연수원에서 그렇게 고민하던 것이 너무도 간단히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반년 동안 시련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같은 프로젝트팀 내에서 한국인은 나 혼자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면접관을 했던 오오무라상과 니이자토상은 팀내에서 직속상관이었다. 니이자토상은 마치 형처럼 나에게 이런 저런 것들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고, 반면 오오무라상은 작업 미스에 대해서는 가차 없었던 오니(귀신)같은 존재였다.  니이자토상의 경우 과거 프로젝트의 직속상관이 한국인이었고 그 사람이 마치 형처럼 대해줬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인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했다. 후에는 함께 일주일간 한국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친해졌고 지금도 상의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만나주는 사이가 됐다. 반면 오오무라상은 일에 대해 너무도 철저했기에 거의 매일 야단맞기 일쑤였고, 한번은 근무표 작성을 잘못해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야단을 맞았던 적도 있었다. 오오무라상 때문에 출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근태만큼은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적어도 오오무라상에게 근태만큼은 인정을 받고 있던 차였다. 나중에 오오무라상과 이야기하면서 직장 내 외국인에 대한 중요한 평가 기준 중 하나가 근태라고 했다. 외국인인 이상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가장 신경쓰게 된다는 것이었다. 일본 IT업계는 다른 업계에 비해 근태가 비교적 자유롭기에 방심해 근태가 엉망인 외국인들이 왕왕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NTT Docomo사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후로 내 몸에 베인 습관이 철저한 보안 의식이었다. 과거 몇 번의 고객정보 유출사건이 발생해 직장 내 철저한 보안의식이 요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년에 두 번 치러지는 보안 연수의 테스트에서 80점 미만 또는 보안카드 분실자는 프로젝트에서 강제 탈퇴 당했으며, 사무실 출입시 보안카드를 사용해야 했으며 설계서, 회의록 등의 용지는 책상위에 방치하지 말 것, 사용이 끝난 용지는 완벽하게 파기할 것, 회의 때 사용한 화이트보드는 깨끗이 지울 것, 개인적인 USB등의 매체 사용 엄금 등. 엄격한 기준 하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나 자신도 개인정보의 중요성을 온 몸으로 체험 할 수 있었으며 지금은 자택에 개인 용지 처리기를 가지고 있는 정도로 개인 정보 관리에 주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개인정보를 소중히 다루려는 일본 기업의 노력에 또 한 번 감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반년이 지나고 일에 익숙해 질 무렵, 1급 보안시설에서의 작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일이 꽤나 고된 작업이었다. 스킬적으로 고되다기 보다는 낮 근무와 야근을 번갈아하게 되는, 일본어로 말하면 시프트근무를 하게 된 것이었다. 야근의 경우 오후6시부터 다음날 오전8시까지 17시간의 근무였다. 1급 보안시설이라 홍채검사 및 지문인식 마지막으로 서버에 접속하기 위해 개인 아이디 및 패스워드까지 입력해야 했다. 작업시간 뿐만 아니라 작업량까지 엄청났다. 결국 작업 3개월 만에 작업자 4분의3이 프로젝트를 그만두게 되었고, 직속상관인 오오무라상 역시 건강이 나빠져 프로젝트에서 빠지게 되었다. 반면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회였다고 판단했기에 입술을 악물고 남아 있었다. 작업개시 4개월 후에는 내가 팀리더가 되어 작업 및 맴버를 관리하게 되었다. 보안실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보고는 전화로 해야 했기에 자연스럽게 일본어 실력과 전화응대 실력이 늘어갔으며 17시간 동안 맴버들과 함께해야 했기에 짧은 기간에 매우 친해지게 되었다. 거의 2주에 한번은 함께 술자리를 할 정도였으니까. 프로젝트 도중에는 본사 사정으로 내가 프로젝트에서 빠지게 되었는데 그동안 나의 근면함과 맴버들과의 융화력이 인정을 받았는지, 고객으로부터 나는 절대 못 빼준다는 요구가 있어 결국 끝까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시간은 물같이 흘러 마침내 프로젝트의 종료일이 다가오게 되었다. 그와 함께 개인적으로는 제대로 된 IT회사에 전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직속 상사였던 오오무라상은 함께 계속 일하고 싶다고 했지만 난 이제 전직을 해야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오오무라상이 속해있던 Cubesystem사에 면접만이라도 볼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Cubesystem사는 NTT Docomo사의 1차 협력회사로 하위에 많은 협력회사가 있으며, 사원이 500명이 넘고 중국과 베트남에 지사를 뒀으며 증시에도 상장되어 있는 중견회사였다. 합격하기 위해서는 부장면접, 전무면접, 사장면접을 통과해야 했기에 설령 불합격하더라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오무라상은 면접을 주선해 주었고, 어느 날 개인적으로 불러내서 면접에 대한 이런저런 어드바이스를 해 주었다. 덕분에 모든 면접을 문안히 볼 수 있었고 사장면접이 끝난 날 합격 통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일본에 온지 1년 반 만에 일본계 IT중견회사의 정사원이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


 합격이 결정된 후 오오무라상이 나에게 한 말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 회사 사원이 된 이상 앞으로 1년 동안은 네가 잘못을 하더라도 내가 모두 책임져 주겠다.”라고... 그렇게 나에게 엄격했던 사람이 지금은 나에게 가장 든든한 상사가 되어있었다. 정말 감사할 따름이고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Cubesystem사의 사원이 된 후 오오무라상은 나에게 부담이 될 정도로 잘 해 주었고 난 거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회사를 그만뒀지만 오오무라상은 나에게 있어 존경하는 한 사람이자 상사로서 남아있다.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을 가겠다는 뜻을 전했을 때도 “그럼 일본어 쓸 일이 줄어들 텐데 언제든지 나에게 메일을 하면 답해 주겠다.”는 대답을 해 주었다. 내 인생에서 사람은 오래 함께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기준을 세워준 소중한 사람이다.


 Cubesystem사의 정사원이 된 후 배속 받은 곳은 또 다시 NTT Docomo사의 전국 밧치 시스템의 관리 담당이었다. 먼저 NTT Docomo사의 1차 협력회사로써 하위 협력업체 사원들을 관리해야 했기에 리더급 사원들은 하루하루 정말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또한 매일 밧치 처리에 관련해서 시스템 성능에 문제가 없는지 감시하고 정기적으로 고객인 NTT Docomo사측에 보고를 해야 했다. 또한 3개월 마다 새로운 서비스가 시작되기 전에 새롭게 추가되는 시스템의 시험을 실시해 결과를 분석하고 통과유무를 판단해야하는 작업이었다. 혹시 시험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원인 분석과 함께 해결책까지 제시해야하는 작업이었다. 특히 NTT Docomo사에 보고하는 날은 그야말로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보고서를 작성해 당연히 일본어로 보고해야 했으며, 고객으로부터 돌아오는 질문에 답해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일 하나하나가 결코 만만치 않았다. log파일들을 분석해서 문제 규명을 해야하는 한마디로 통계치와의 싸움이었다. 소숫점, 숫자하나 틀리는 날엔 큰 일이 날 수도 있는 작업이었다. 또한 문제 분석을 위해 다른 부서까지도 연락해 확인을 해야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이 이번 현장은 지금까지의 프로젝트에 비해 한국인이 많았다. 우리 부서에만 나를 합쳐 3명의 한국인이 있었고, 나보다 먼저 프로젝트에 참여한 2명은 이미 입지를 굳히고 있었기에 의문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 볼 수 있어 든든한 존재였다. 그리고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국인 2명과 함께  언제나 점심식사를 함께하며 맘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같은 팀의 나 보다 나이가 많은 분은 같은 지역 출신에 아버지 고등학교의 후배라 금방 친해 질 수 있었고, 지금은 서로의 세세한 것까지 이야기 나누는 사이가 됐다.


 일본에서 안정된 직장에 들어와 이제 일본생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1년 남짓 근무하면서 또 다시 생각이 바뀌게 되는 계기가 생각지도 못하게 찾아왔다. 새로운 직장에 취업하고 얼마 뒤, 대학교 은사께서 일본에 교환교수로 오시게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다시 공부해 볼 생각이 없냐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 순 마음속에 동요가 생겼다. 언젠가는 대학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겨우 일본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됐는데라는 생각에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도 마음 한 켠에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떠나질 않았고 점점 커져만 갔다.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일본에 가기로 결심했을 때 처럼 말이다. 결국 다시 한 번 교수님을 찾아뵙고 이런저런 상담을 나누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일본 미디어문화 방면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차였다. 교수님께서는 네가 더 넓은 안목을 가지기 위해서는 영어 공부는 필수라는 당부를 하셨고 먼저 영미권에서 유학을 한 후 박사과정은 일본 대학에서 마치는 것이 어떻겠냐는 조언을 해 주셨다. 그리고 같은 팀의 형님께서도 이런저런 조언을 많이 해 주셔서 결정하기에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내 성격자체가 뭔가 하기로 결정하면 밀어붙이는 스타일이기에 내년 초에 유학을 목표로 회사에 사직서를 냈고 지금은 일본에서 생활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 2년반동안 내가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일본인이라는 것에 더 감사함을 느낀다. 일본을 떠나게 됐다고 일본인 지인들에게 전했을 때 모두 아쉬워해 주었고 송별회는 꼭 하고 가라고 말해 주었다. 8월 한 달은 송별회 다니기에 바쁠 것 같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했고 일본에 대한 인식 전환을 하게 되는 기회였다. 과거 아픈 역사가 있지만 일본에 대해 감정적이 아닌 객관적으로 제대로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일본생활에서 가장 큰 성공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를 위해 자기일 처럼 신경 써 주신 많은 분들에게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겠다고, 나 역시 그 분들이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나서야 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한다. 그리고 새롭게 펼쳐질 앞날을 처음 일본에 오기로 결심했을 때의 마음가짐으로 나아갈 것이다.